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의 난 (문단 편집) ==== 평정의 기회를 놓치다 - [[동관]] 함락 ==== >이때, 안녹산은 비록 하낙(河洛)에 있었지만, 그 군사들은 동에서 [[카이펑시|양]]·[[상추시|송]]에 머물러 있었고, 남으로 [[허나라|허]]와 [[정나라|정]]을 넘지 아니하였다. 이광필·곽자의가 하삭(河朔)의 군사를 통솔하자 (안녹산은) 항과 정에서 연이어 패하였다. 만일 효와 함(동관)을 고수하고 병사들이 경거망동하지 않았다면, 훙역(兇逆)의 세력은 스스로 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서한이 출정을 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당현종|황제]]는 도망치고 조정은 함몰하고 백관 관료는 목을 매달고 [[양귀비|비]]와 그 무리들은 죽임을 당하고 군대는 천하에 가득하고 독은 사해에 흐르니, 이 모두는 [[양국충]]이 부른 앙화였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구당서]]』''' 양국충전}}} 안녹산의 난은 한 달 만에 하북 전지역과 하남 상당수, 낙양까지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채 6개월도 못 가 장악지역이 낙양 주변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 사진이|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녹산 세력이 조기 진압될 것이라 희망했고]],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킬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면서 ~~애꿏은~~ 수하들을 책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녹산이 위기감을 느끼는 만큼 양국충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반란 이전 양국충과 가서한의 관계는 그럭저럭 원활했다. 안녹산을 견제하기 위해 천보 14재(755)에 서평군왕[* 안녹산이 바로 전해에 동평군왕직을 받았다.]으로 추천한 것도 양국충이다. 하지만 가서한이 호부상서 안사순[* 삭방절도사였다가 안녹산이 봉기하자 호부상서로 임용되어 조정에 입사했다. 안사순이 안녹산의 일족이었기 때문에 감시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서한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안사순이 안녹산의 당형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안녹산의 필체를 모방하여 안사순이 안녹산과 내통하고 있다고 무고한 뒤 안사순의 죄 7가지를 나열하면서 그의 주살을 청했고, 안사순은 그 동생 안원정과 함께 목숨을 잃은 뒤 그의 일족들은 영외로 이주당한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양국충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무리 감시목적으로 불러들였다고 해도 엄연한 조정의 [[대신]]인 안사순을 일족이라는 이유로 임의대로 처형할 수 있는 가서한의 힘을 실감했으며, 전란의 책임으로 따지면 양국충 자신보다 더한 인물도 없었기 때문. 일단 이 때의 가서한의 위치는 사실상 당 [[군부]]의 최고위직이었는데, 원래 반란 발발 이전부터 안녹산에 맞먹는 군부 내 최고의 위상을 가졌다. 당장 장안을 방위하며 [[안서절도사|안서]], [[북정절도사|북정]] 지역과 당 본토를 잇는 지역인 [[하서절도사|하서]], [[농우절도사]]직을 동시에 겸하고 있다는 것은(동원가능 전력 15만) 다른 절도사급에 비해서도 한 단계 위라 봐도 좋다. 안녹산과 라이벌의식을 가졌다고 볼 만한 기록도 많은 편이다. 덤으로 반란이 진행되면서 동격 절도사들이 대부분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양국충이 가서한의 지휘권을 벗어난 병력을 마련하려 시도했다가 그것마저도 가서한에게 빼앗기자(...) 양국충은 가서한의 급부상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거기다 가서한 주변 사람들이 양국충을 주살할 것을 가서한에게 건의하고[* 구당서에 따르면 '안녹산이 병사에 의거하면서, 양국충 주멸하는 것으로 명의를 삼고 있으니 만약 병력 3만 남겨서 관을 지키게 하고, 정예로 모두 돌려 양국충 주멸하면, [[오초칠국의 난|이는 한나라가 7국을 꺾은 계책]]인데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이라고 가서한에게 건의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양국충이 동관으로 납치되기도 하는 등[* 왕사례가 기병 30명으로 납치했었다고 통감이 전한다.] 양국충이 느끼는 생명의 위협은 갈수록 상승하게 된다. 결국 양국충은 [[당현종]]에게 말해 가서한으로 하여금 '''[[동관]]을 나가 안녹산을 공격'''하라는 최악의 명령을 내리게 한다. 이는 가서한의 지휘권을 견제함과 동시에 가서한의 드높은 위상을 깎아내고자 함아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문제는 이 발상이 전형적인 내 정치적 라이벌이랑 반란군이랑 치고박고 싸우다 둘다 죽어버리라는, 멍청한 발상이었다는 것.~~이런 막장이 윗대가리라고 떡하니 있으니 반란이 끝날 생각을 안 하는 것도 당연하다~~ 더군다나 양국충에게 군사적 안목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 나름의 제대로된 계산조차 없이 나라의 흥망을 자기 정치생명을 위한 도박패로 던져버린 [[세계사]]에 길이 남을 트롤링이었다. 이때 동관을 거점으로 하는 가서한군의 질은 물론 작년(755년) 봉상청과 [[고선지]]가 지휘하던 병력에 비하면 질적으로 많이 향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서한이 동관을 진수하면서 지원병으로 끌고간 8만여 병력에는 하서, 농우, 삭방번진의 병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재물로 저자거리에서 급하게 초모한 기존 병력에 비하면 월등한 질을 갖춘 병력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어쨌든 20만에 육박하는 가서한군 병력의 절반 정도가 급하게 초모한 오합지졸인 것은 여전했으며, 안녹산군이 물론 하북에서의 전개로 인해 낙양 일대에서 고립된 상태였다고는 하나 범양, 평로, 하동번진의 정강한 군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서한군이 질적으로 안녹산군에 비해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는 것은 딱히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서한은 물론 이점을 깨닫고 있어 '안녹산군이 약하게 보이는 그거 함정입니다' 하는 주문을 거듭 올렸고, 사사명군 완전 제압을 눈앞에 두고 있던 곽자의와 이광필 또한 '범양만 평정하면 안녹산군은 자중지란으로 붕괴될 것이니 함부로 동관을 나서면 안됩니다'는 건의를 올렸으나 양국충, 그리고 양국충에 의해 설득된 [[당현종]]이 거듭하여 가서한에게 진격명령을 내리자 가서한은 어쩔 수 없이 동관을 나섰다. 가서한군은 안녹산군의 지휘관인 최건우와 [[함곡관]] 서쪽 평원에서 조우했다. 가서한은 자신의 군대를 왕사례가 정예병력 5만여를 이끌고 전방에, 아직 질적으로 미숙한 병력은 방충 등이 지휘하여 후방에 전개하고 가서한 자신은 예비군 3만여를 이끄는 포진을 하는 등 부족한 부분을 최대한 메꾸려 노력했던 것으로 보이나 최건우는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몰아붙이는 가서한군의 진격을 좁은 지형을 활용한 [[복병]]으로 저지하고 동라의 정예 기병으로 하여금 질적으로 부족한 군사들이 위치해 있던 후방을 가격한다. 이에 후방의 군대가 붕괴되면서 앞서 나가던 정예병력까지 한꺼번에 전열이 붕괴되어 버렸고, '''[[전멸|동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병력은 단 8천]]'''이었다고 한다. 이후 간신히 돌아온 가서한은 후방의 관서역으로 물러나 흩어졌던 병사들을 다시 긁어모아 동관 방위에 나서려고 했으나 화발귀인이 고선지와 봉상청의 최후를 못 보았느냐며 가서한을 납치한 후 안녹산에게 같이 가서 항복한다.[* 이후 화발귀인은 안녹산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안녹산은 반란 이전 자신과 맞먹던 위상을 가진 인물인 가서한의 항복을 환영했던 듯 보이나, 가서한이 이광필, 오왕 이지, 노경을 회유하겠다면서 보낸 편지가 효과가 없었고, 특히 자신이 천거했던 노경에게는 욕까지 먹을 정도로(...) 경과가 안 좋자 그대로 낙양에 억류된다.[* 이후 가서한은 나중 [[안경서]]가 낙양을 탈출할 때 그동안 억류되어 있었던 다른 조정 대신들과 함께 살해당한다. 그의 아들은 [[당덕종]] 시기 4진의 난 진압에 투입되었으나 별 활약은 못했다.] 동관의 함락은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으며 하동, 화음, 빙익, 상락의 방어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대거 군을 이탈, 도주하기도 했다. 만약 이때 동관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면 안녹산의 난은 아마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개고생|756년 중에 평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동관의 전투는 당 조정이 당한 최대 최악의 전략적 패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